Posted tagged ‘인생’

무언가를 시작하기에 너무 늦은 나이는 없다

9월 24, 2009

“그때 나 스스로 늙었다고, 뭔가를 시작하기엔 늦었다고, 잘 놀고 잘 지내다가 죽음이나 기다리자고 생각했던 것이 큰 잘못이었습니다.그때 나무라도 심었으면 그 나무가 얼마나 자랐겠습니까?  나는 지금 아흔다섯 살이지만 정신이 또렷합니다. 앞으로 10년, 20년을 더 살지 모릅니다. 이제 나는 하고 싶었던 어학공부를 시작하려고 합니다. 그 이유는 단 한가지, 10년 후 맞이하게 될 105번째의 생일날! 아흔다섯 살 때 왜 아무것도 시작하지 않았는지 후회하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장수 경영의 지혜,  88세 샘표 박승복 회장이 말하는 ‘인생의 성공, 사업의 성공 이야기’ 중에서 소개된  박승복 회장이 한 원로 모임에서 들었던 어떤 한 노인의 일기 내용이라고 한다. 주변에 무언가를 시작하기에 너무 늦은 나이라는 한계를 스스로 한정지으려는 경우가 많다.  내가 만약 그 즈음에 그 노인처럼 그 무언가에 도전할 수 있고, 신체 나이를 되돌릴 수 있는 젊은 마인드를 갖고 있다면 또 하나의 행복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내 나이가 몇 살이든 스무 살의 젊음을 유지할 수 있다면 무언가를 시작하기에 늦는다는 것은 없는 것이다. 다만 하지 않을 뿐이니깐….

21세기 새로운 행복론

1월 7, 2009

……….NQ는 새로운 네트워크 사회에서 우리 모두가 잘살기 위해 갖추어야 할 공존의 능력을 말한다. 그것은 더불어 살아갈 수 있는 자격을 알아보는 잣대이며 또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들과의 소통을 위한 도구이기도 하다. NQ의 또 다른 이름은 행복지수다. 먼저 자기 것을 내어주고 나누고 베푸는 것이 성공모델이다. 이렇게 아무런 조건 없이 자신을 낮추고 남을 배려하면 모든 사람에게 존경받고 스스로의 가치도 올라가게 된다. 그리고 언젠가는 큰 힘이 되어 자신에게 돌아오게 하는 것이 바로 NQ의 힘이며 철학이다………………………

NQ는 개인 중심의 성공에 집착하기보다는 다른 사람을 도우면서 서로의 성공을 도모하는 21세기의 새로운 행복론이다. …………… ‘NQ로 살아라’ 中 에서..

김무곤의 ‘NQ로 살아라’ 에서 신선하게 제시되고 있는 NQ는 Network quotient 즉 함께 더불어 살 줄 아는 능력으로서의 공존지수를 말한다.  자신의 능력을 키워 잘살기 위한 지능지수(IQ), 감성과 창의력을 키우는 감성지수(EQ)도 전부 혼자만의 행위이지만 NQ는 네트워크 시대에 신뢰라는 무형의 자산으로 결국 함께 어우러져 살아가는 공존지수라고 볼 수 있겠다. 지연과 학연 등도 어떻게 보면 네트워크 아닌가라고 할 수 있겠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공존지수와는 다소 거리가 있어 보인다. 돈 주고 구할 수 없는 ‘신뢰’라는 가치 기반 위에 서로 공존하기 위해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과 소통하고 더불어 살아가는 성공모델을 공유한다는 측면에서 단순한 네트워크 그 이상의 의미를 지녔다는 생각이 든다.

There is no wealth but life.

1월 6, 2009

인생의 풍요로움을 느끼는 자만이 진정한 부자이다.

예전에 백화점에 가면 숏빵이라고 해서 식빵이 막 나오기 시작하는 이른 시간에 가면 썰지 않은 식빵을 자주 사와서 먹곤했다. 앉은 자리에서 식구가 식빵 하나를 뚝딱 해치우는데 빵을 먹으면서 이런저런 얘기들을 하면서 웃기도 하고 함께 TV도 보면서 한 주간의 피곤함을 풀곤 했다. 2,000원(그 당시)짜리 식빵 하나가 갖는 효용가치는 그저 배를 채우기 위해 영양섭취와 맛을 즐기는 것만의 의미를 가지는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적어도 우리 가족에게는 말이다.

단순한 재화 그 이상 가족이 대화하는 커뮤니케이션으로서의 수단으로도 충분한 가치를 가졌던 셈이다. 문화경제학자인 러스킨(J.Ruskin)과 인도의 노벨경제학 수상자 아미티아 센(Amartya Sen)도 재화의 소비를 통한 새로운 행복론을 얘기한 적이 있는데 즉 재화에 내재된 고유가치를 향유하고 즐기는 능력을 기를 때 더욱 인간적인 경제생활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재화의 고유한 가치(intrinsic value)를 즐길 수 있는 향유능력(acceptant capacity)을 지녔는가 하는 점이다. 사실 내가 요즘 고민하고 있는 부분도 ‘intrinsic value’  그리고 ‘acceptant capacity’ 에 많은 초점이 있다. 단순히 누구나가 바라보는 사물, 재화의 관점에서 뿐만 아니라 고유한 가치를 발견하고 즐길 줄 안다면 얼마나 더 인생의 풍요롭겠는가 말이다. 빵 한 조각으로도 가족의 웃음꽃이 필 수 있고 그런 가치를 발견하고 만들어가는 사람이라면 진정 행복한 사람이 아닌가 싶다. 그런 면에서 오늘날 문화경제학의 명제라 일컬어지는 러스킨의 다음 구절은 정말 되씹어 볼 필요가 있을 것다.

There is no wealth but life – 러스킨 –

빵 하나에도 그 재화가 가진 고유 가치를 향유하고 이를 통해 사랑의 커뮤니케이션을 유지하고 작은 것에서도 생활의 풍요로움을 느낄 때 우리는 진정한 부자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새해를 시작하면서 주변에 작은 것에서도 행복과 웃음을 찾을 수 있도록 항상 마음을 열어놓아야 겠다.

Veronika Decides to Die

12월 26, 2008

어느 때보다도 조용했다는 이번 크리스마스에 Veronika Decides to Die[by Paulo Coelho]라는 책과 함께했다. 몇 가지 감명깊었던 구절이 있어..남겨보고자 한다.

“세상은 경이로움으로 가득 차 있고, 인생은 매순간 그 경이로움을 만나는 모험여행이다.”

“이 세상에 우연히 일어나는 일이란 아무것도 없다”

“다른 사람들이 강요하는 방식이 아니라, 내가 꿈꾸는 대로 내 삶을 살고 싶거든….”

“약간의 지혜롭게 행동하고 일상새왈의 도전에 맞설 수 있다면 밖에서도 얼마든지 하고 싶은 모든 것을 즐기며 살아갈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인간은 죽음의 자각을 통해 더욱 치열한 삶을 살 수 있다”

삶에서 기대했던 모든 것을 마침내 얻게 된 베로니카는 자신의 삶이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결론에 이르고 죽기로 결심한다. 하지만 자살시도에 실패하고 정신병원인 빌레트에서 요양하면서 삶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는 과정을 보여준다.  우울증을 겪게 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정신이상에 빠져들게 된다. ‘세로토닌’이라는 물질은 인간의 정신 상태에 영향을 미치는 한 요인인데, 세르토닌이 부족하면 집중하고, 먹고, 자고, 삶의 행복한 순간들을 즐기는 능력에 이상이 생긴다는 것이다. 그 물질이 아예 없으면 인간은 절망, 비관주의, 자신이 아무런 쓸모가 없다는 느낌, 과도한 피로, 불안, 결단력 결여에 시달리다 결국엔 완전히 무력한 상태, 나아가 자살에 이르는 만성적 우울에 빠져들게 된다는 것이다.

소설 속에서는 죽음의 문턱까지 간  베로니카에게 한 정신과 의사는 새로운 시도를 하고 자살을 시도하는 사람들에게 혹은 만성적 우울증에 빠져든 사람들에게 삶의 자각이라는 해법을 제시한다. 정신질환을 유발시키는 독성물질인 비트리올에 대해 알려진 유일한 처방이 ‘삶의 자각’이라는 것이다. 자살에 실패한 사람은 조만간 다시 자살을 시도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이고르 박사는 베로니카가 자살에 실패하자 페노탈이라는 약을 투여해 심장발작 효과를 가장해 심장발작으로 죽음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한다. 일주일간 베로니카는 죽음을 다시 생각하게 되고 자신의 삶을 돌이켜볼 시간을 갖게 된다. 그 시간동안 병원에서 또 다른 환자를 만나 삶의 의미를 깨닫고 탈출에 성공하게 된다.

이 소설은 ‘인간은 누구나 죽는다’는 것을 아는 것과 자신의 죽음을 실감하는 것은 엄연히 다르다는 것을 말해준다. 언젠가 인간은 죽는다는 것을 알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막연한 미래의 일이다. 우리는 죽음을, 달리 말하면 삶의 진가를 잊고 산다. ‘인간은 죽음의 자각을 통해 더욱 치열한 삶을 살 수 있다‘는 의미를 전달해주는 것 같았다.

미완성에 바치는 열정

11월 28, 2008

‘카르페 디엠’이란 말이 있다. 현실에 충실하라..현재의 삶에 최선을 다하라 정도로 알고 있었는데.. ‘현실에 충실하라’는 뜻의 라틴어 카르페 디엠 속에 담긴 숨은 의미는 내일 죽을 것처럼 오늘을 살라는 격려이자 응원이 담긴 말이라는 것을 어느 책 구절에서 본 적이 있었다. 오늘의 진한 고통을 차라리 즐거움으로 여기고 자신을 던지라는 메세지. 자신을 던지고 태우는 자를 누가 당하겠냐는 것이다.

파울로 코엘료 작가의 ‘연금술사’는 평범한 양치기 청년 산티아고가 보물을 찾기 위해 모험을 떠나는 여정을 묘사한 작품인데 도둑, 낙타몰이꾼, 왕, 여인 등 너나할것 없이 보물을 찾기 위해 험난한 여정을 시작한다. 이 소설은 사실 금 자체보다 그것을 찾으려는 꿈과 소망, 그리고 그 꿈과 소망을 찾아가는 여정이 오히려 눈부신 순금의 시간이라는 메시지를 던지고 있는데 진정한 연금술은 철이나 납을 금으로 바꾸는데 필요한 끝없는 수련과 연마가 필요하듯 세상의 이치를 터득하고, 만물과 통하는 우주의 언어를 꿰뚫어 자아의 신화를 찾는 여정임을 보여 주고 있다는 것이다.

인간에게 누구나 한 번 이상의 실패가 찾아오는데 이 때 좌절하거나 포기하려 든다면 의지력이 약해지고 정신이 쇠퇴하고 에너지를 발산하는 엔도르핀과 리비도가 죽음의 에너지(타나토스라 한다)로 변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모험을 감수한 여정에서 믿음을 잃어버리는 순간, 혼돈과 아노미의 나락으로 떨어지고 만다는 것이다.

정말 불확실성의 하루하루를 호흡하면서.. 저 먼 미래를 바라보면 요즘 같은 상황에서 삶의 여정을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고민이 자꾸만 쌓여가는 것 같다. 파울로 코엘료는 “인간의 마음은 정작 가장 큰 꿈이 이루어지는 걸 두려워 하지만 무언가 간절히 바라면 온 우주가 당신의 소망이 실현되도록 도와준다”고 말한다. 세상 일은 믿는 만큼 이루어지고 꿈이 실현된다는 굳건한 믿음을 가지면 이미 절반은 이루어진 셈이라는 것이다. 고통 없이 아무것도 얻을 수 없고, 모험을 감수해야만 세상에서 무언가를 얻을 수 있다. 끊임없이 갈고닦는 것, 평생 자아를 찾아 나아가는 것, 이것을 저자는 연금술의 법칙이라 말한다.

요즘 삶에 대한 본질적인 고민들로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줄타기 하는 나의 모습을 종종 발견한다. 삶은 어디서 시작해서 어디서 끝나는지가 중요한게 아니라면 ..삶은 언제나 새로운 시작이고 끝없는 과정이라는 그리고 그 과정이 무한한 나의 삶에 대한 믿음과 열정 그리고 마음가짐과 어우러져 감동을 만들어갈 수 있다는 작은 기대가  그나마 내가 오늘을 항해해 나가는 삶의 작은 원동력이 되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